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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기 앞의 생 (20190317, 명동예술극장)』

과거의 흔적/후기

by mizu-umi 2020. 3. 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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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9

살면서 하게 되는 많은 선택 중에 이게 정말 나에게 이득일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채 하는 선택만큼 두려운 게 없다. 무대작품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지난 3월에 보고 왔던 국립극단의 『자기 앞의 생』과의 만남이 그러했다. 내가 보고 싶어 고른 무대 중에 꽝이 있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작품을 보기 전에 평을 보는 것은 작품을 순수하게 보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니, 간혹 SNS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몇마디 짧은 감상 (감동이었다 정도)이 자기 앞의 생(이하 자앞생)을 볼 날을 기다리는 동안의 위안이었다.

 

공연을 보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을 잠시 들어가는 6일 동안 가능하면 한작품이라도 공연을 보고 싶었고 애인과 명동에서 호캉스를 보내기로 해서 그렇다면 궁금했던 이걸 보기로 한 것.(자앞생 이외에 뮤지컬 킹아더도 예매했다) 애인도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해서 같이 보기로 했고 발매 당일 알바를 가야하는 나를 대신해서 애인이 예매해주었다.

 

나보다 먼저 공연을 본 지인이 원작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아는 것이라곤 국립극단 공식 홈페이지의 공연안내에 개재된 시놉시스 뿐이어서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공연을 봤다. 한번 밖에 못보는 기회에 누군가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도전할만한 도박이었다. 사전 정보가 없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시야가 더 넓을 수 있는 반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원작과 비교하는 재미가 사라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게 있어 연극은 잘 정리된 각본과 연출, 배우들의 열연이 중시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원작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봤던 날의 캐스팅 : 양희경 배우님무대 시작 전에 찍은 무대 사진

 

공연을 보기 전까지 가졌던 걱정은 고사하고, 2월달에 했던 문화생활이라곤 유럽여행 중 오스트리아에서 보았던 오페레타 뿐이었는데다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 2017년 11월의 1984 이후로 오랜만이라 무대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매우 두근거렸다. 정각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 공연은, 서곡에 뒤이어 로자 아줌마가 요리를 하고 있는 뒷모습으로 시작했다.

 

이제 막 한해가 시작된 시점에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자앞생』은 올해 들어서 본 첫 연극으로써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국립극단이 질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한국을 떠나기 전 6개월 동안 국립극단 작품을 거의 빠짐없이 본 나로써는 당연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개중에는 생각보다 졸작이나 망작들이 있어서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으니 생략한다. 원작을 전혀 모르고 봤지만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웠다. 보는 도중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여러차례 휩싸였지만 참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폭포수 같이 터지기 시작해서, 공연이 끝나고 호텔로 이동하고 나서도 침대 위에서 계속 울었다. 로자 아줌마의, 늘 말은 거칠어도 누구보다 모모를 사랑하는 그 마음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모모의 인종과 종교,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다. 거기에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발생한지 얼마 안된 점과 바로 전날 애인과 다투었던 주제가 더해져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나를 휘감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출처: 국립극단

 

무대의 여운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원작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하면서 작품을 곱씹으니, 소설 속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모 개인의 이야기 같은 세세한 내용들을 가지치기 하고 로맹 가리가 담고 싶었던 메세지는 그대로 살린 매우 깔끔한 각본임을 실감했다. 극 중 우스갯소리 처럼 지나가는 말도 전혀 가볍지 않았다. 물론, 각색만 잘 된 것은 아니다. 각본의 대사들은 원작 소설의 번역본에서 온 것으로, 원작부터를 읽기 편하고 와닿게 번역한 번역가 분의 노력도 느낄 수 있었다.

 

배우분들의 연기는 단연 최고였다. 출연하는 배우님들 연기를 이번에 다 처음 접한 것인데 어느 분 하나 빠지는 분이 없었다. 양희경 배우님의 로자 아줌마는 원작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고 오정택 배우님의 모모는 누가 봐도 어린 소년이었다. 두 분의 호흡도 정말 좋았고 그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지하실에서 로자 아줌마와 모모가 함께 기도하는 장면과 반가사 상태에 빠져서 일어나지 않는 로자 아줌마를 홀로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작품을 다양하게 보러다니기 시작한지 몇년 안되어서 박혜선 연출님도 이번에 처음 접했다. 무대 위의 소품부터 시작해 배우의 동작, 어투, 연기라는 요소 하나하나에는 그 배우의 내공이나 무대 미술의 질도 있겠지만 그만큼을 의도하고 이끌어내는, 무대 위의 지휘자Conductor인 감독관Director인 연출의 능력도 반영된다. 『자앞생』이 가진 메세지의 강렬함과 무대 장치 이동이나 배우의 움직임, 소품의 활용 등이 어우러져서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좋았던 연출은 지하실로, 배우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통로인 중간의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객석에서 왼쪽에 있는 벽이 움직여 등장하는 지하실과 무대 조명을 어둡게 하고 지하실 입구를 푸른 조명을 비춤으로써 지하실이라는게 실감나게 했다. 이 무대 장치의 이동이 특히 더 좋았던 것은 커튼콜 때로, 커튼콜 마무리로 다시 한번 벽이 열리면서 모모와 로자아줌마가 팔짱을 끼고 지하실 위로 함께 올라간다. 어쩌면 두 사람이 가장 원했을 삶을 커튼콜 때 실현시키는 연출로 내 눈물 꼭지를 고장내버리셨다.

 

애인은 로자 아줌마가 화장을 짙게 하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손님을 유혹하듯 모모를 유혹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으로, 몸파는 창부였던 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하는 행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객석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애인은 그 부분이 마냥 우스꽝스럽지 않고 성노동자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매우 좋았다고 했다.

 

애인과 나 모두에게 너무 좋았던 작품이라 굳이 비판할 요소를 찾아내라고 한다면 배우분들의 딕션이었다. 이건 나도 애인도 그렇고, 애인 옆자리에 앉은 분(?)도 그랬는데, 가끔 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영자막을 봐야했다(영자막 제공해주는 날이었다). 로자 아줌마는 몸이 아프고 나이든 사람이니 조금 알아듣기 어려운 발성을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모모를 맡은 오정택 배우님 딕션이 그렇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딕션이라기보다는 명동예술극장 무대가 마이크없이 진행되서 인것 같다.

 

 

출처: 국립극단

 

이런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다.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의 삶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1960~70년대를 무대로 하는 작품이니 저런 빈민가 이야기는 구시대의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어느 혜택도 받지 못하는 빈민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차별부터 시작해 인종이나 종교로 차별하며 편을 가르는 일이 파다하다는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약 100분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스탠스를 확립하는 데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크게는 사회가 변해야 하지만 그런 사회도 작은 움직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나뿐 아니라 이 작품을 본 모든 사람들이 이런 보이지 않는 곳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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