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첫 페이지를 열었지만 챕터 1의 한 페이지 정도만 읽고 봉인해 두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SF소설은 꾸준히 읽은 반면 정통 판타지 소설은 <정령왕의 딸> 이후로 읽은 적이 거의 없다. 정통 판타지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작가의 책을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는데, 왜 이 작품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실감했다. 그때는 왜 더 읽어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푹 빠졌다.
우선, 작품 속 상황이나 시간 묘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호빗은 반지의 제왕과 비교하면 분량이 짧은 소설이지만 여전히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이다. 톨킨은 외로운 산을 되찾기 위해 떠나는 1년간의 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간단한 몇 줄만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각 챕터의 시간선이 이어질 때도 있지만 한 챕터 안에서 많은 시간이 흐르기도 하는데, 그 많은 시간 -예를 들어 일주일이 아니라 한두달 정도-이 몇마디 묘사로 훅 흘러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아 자세한 묘사가 답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둘째로, 적재적소에 작가의 위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인물 묘사나 상황 묘사에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조금씩 들어가는 우스갯소리가 이 작가와 작품이 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영화에서 받았던 어딘가 포근하면서도 무거운 인상이 이 위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위트가 잘 살았다는 건 그만큼 번역이 훌륭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미 문학을 번역한 책 특유의 딱딱함이 적었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연구하면서 번역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영화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이미지가 금방 떠오르는 게 좋았다. 다만, 영화를 본 지도 오래돼서 영화가 어떻게 각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과 영화를 비교해볼 겸 이 여운이 가시기 전에 영화 삼부작도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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