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有
김초엽은 신간이 출간되면 바로 구매할 정도로 믿고 보는 작가다 (비록 모종의 이유로 에세이집은 아직 사지 않았지만). 므레모사도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예약해서 구매했는데 읽기로 마음먹기까지 꽤나 오래 걸려서 인제야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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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폐쇄된 공간이었던 므레모사는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투어 상품을 오픈한다. 여행 유튜버인 한국인 주연, 여행 잡지 담당자인 태국인 탄, 다크 투어리즘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일본인 이시카와, 다크 투어리즘을 즐기는 헬렌, 사업자였다고 말하지만 유명한 무용수였던 한국인 유안, 그리고 사업을 하다 말아먹고 므레모사까지 오게 됐다는 장기여행자 레오. 의심쩍은 방법으로 투어에 선발된 6명의 여행자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므레모사로 향한다.
유안은 함께 온 다른 여행객들 대비 전혀 이 투어에 큰 흥미나 즐거움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여행 목적을 투명하게 밝히고 서로 가까워지지만, 유안은 자신의 직업도 숨기고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감춘다. 한편, 유안은 투어 초반부터 유독 자신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레오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폐쇄구역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 버릴 쓰레기통을 찾지 못해 가방에 넣어두었던 쓰레기봉투 안에서 마약처럼 보이는 약을 발견한 유안은 약의 주인이 레오임을 알고서 그를 추궁하고 이 투어에는 ‘함정’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튿날, 므레모사를 방문한 두 사람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므레모사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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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레모사는 가상의 나라인 이르슐의, 지금은 ‘좀비’가 된 귀환자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마을 므레모사로 향하는 다크 투어리즘을 주축으로 그 첫 번째 투어에 참여한 주인공 유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서 다크 투어리즘이란 말 그대로 ‘어두운 관광’으로 세계 이곳저곳에 있는 비극의 장소에 방문하는 투어를 의미한다.
므레모사를 읽으면서 투어에 신이 나 열변을 토하는 인물들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다크 투어리즘의 기반은 결국 누군가의 비극을 소비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초등학생 때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온 게 생각났다. 방송에서 형무소가 소개될 때마다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는데 수학여행으로 진짜 가게 되어서 신이 나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랬지라고 생각하다가 더글로리를 보던 내가 생각났다. 복수극을 보고 읽는 것도 결국 형태만 다를 뿐 누군가의 비극을 소비하는 일이지 않은가.
본 작품은 유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비극과 므레모사라는 마을의 사회적 비극을 번갈아 이야기한다. 유안의 비극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으면서도 므레모사의 그것과 닮아있다. 유명세로 인해 대중에게 노출된 비극, 그로 인해 받기 시작한 ‘동정’ 어린 시선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며 삶을 영위하는 유안은 여전히 끔찍한 고통을 언젠가 멈추는 날을 소원하며 살다가 우연히 발견한 므레모사의 비극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발견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갈망과 그로 인한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안은 스스로 멈추기를 선택한다. 비극으로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던 므레모사의 주민들이, 고향에 남아 그대로 멈춘 채 살아가는 것처럼. 극 중 유안의 독백과 그의 주변인들이 하는 말, 그리고 유안이 마지막에 행하는 선택은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늘 달려가야 하는, 앞만 보고 살아가야 하는 삶만이 옳을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절망에서 헤어 나와야만 할까.
끝날 리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절망에는 꼭 구원이 있어야 할까.
어느 것 하나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들이다. 비극은 오로지 비극을 당한 자들만의 것이니 말이다.
한편 므레모사는 폐쇄된 공동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이는 김초엽의 첫 번째 장편인 지구 끝의 온실에서도 다루어진 요소이다. 두 공동체는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지구 끝의 온실의 프림은 회복(전진)을 위해 ‘함께’ 한다면 므레모사의 므레모사는 고통(정체)을 위해 ‘함께’ 하고 프림은 미래를 위해 흩어진다면 므레모사는 과거를 위해 모인다. 지구 끝의 온실은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로 비극의 앞날을 이야기하면서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는 한편, 므레모사는 서늘하고 날카롭게 절대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많은 질문을 남긴다.
이 두 장편의 차이는 마치 희망이 있다면 절망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구 끝의 온실이 희망을 노래한다면 므레모사는 절망을 토해낸다.
처음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정의 물성’에 끌렸던 게 생각난다. SF라지만 현실에 맞닿은 부분이 많았고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축축하고 우울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므레모사는 그 축축하고 우울한 것들을 한데 모아 긴 호흡으로 뿜어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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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가 공포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읽었다. 공포 장르 특성상 언제나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동반되다 보니 초반에는 아리송하던 전개가 중반을 지나서 복선과 함께 하나하나 풀리는 게 재밌었다.
꺼림칙한 묘사가 적지 않았지만, 기존의 김초엽 소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그 작품이 보이는 것 같았다. 김초엽의 소설은 이야기 속에 작가 본인이 투영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만든다. 작가 특유의 어딘가 건조하고 허무한 느낌의 문체도 좋다. 절대 쉽게 안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푹 빠져서 읽게 만드는 것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에서 시작해 [지구 끝의 온실] 초고와 완고, [방금 떠나온 세계]와 [행성어 서점]에 이어 [므레모사]까지, 김초엽 작가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주제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의 유기체 같다. 아직 에세이들은 읽기 전인데 얼른 읽어봐야겠다. 이야기 밖의 김초엽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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