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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코스모스 - 여명의 하코다테』(예술공간 혜화)

감상/공연

by mizu-umi 2021. 4. 1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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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후기를 작성했던 국립극단의 햄릿을 보고 나서, 이봉련 배우님의 연기를 실황으로 보고 싶어졌다. 인터파크 앱을 열어서 '이봉련' 세 글자를 검색해보니 마침 3월에 연극을 하시는 게 아닌가. 한 번은 꼭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3월 14일 공연을 예매했다. 이때는, 내가 같은 공연을 세 번 더 예매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연극을 3/14, 3/17, 3/26, 3/28까지 총 네 번을 봤다. 처음 두 번은 혼자, 마지막 두 번은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함께 봤다. 한 작품을 여러 번 본 이유는 단순하다. 3월 14일의 경험은 너무나도 강렬했고 한 번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보고 나서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인상을 받음으로써 내 주변에서 가장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을 이 연극으로 초대했다. 한 사람은 친한 동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엄마였다. 두 사람 모두 공연을 보고 나서 작품이 좋다는 내 말에 동의했다.

 


 

너희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감독관(어쩌면 군인)의 독백 아래, 홋카이도 유바리 탄광의 노동자들은 좁은 갱도를 지나간다. 나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일목 하에 합장까지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못해서, 땀 흘려 일을 한 만큼의 대가는 주먹보다도 더 작은 식량과 물통 속 검은 물로 돌아온다. 유바리 탄광에서 일하는 범죄경력이 있는 일본인들과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탄광에 온 조선인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말은 통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특히, 미친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조선인 요한은 밤만 되면 '하늘에서 빨간 눈이 온다'는 헛소리를 지껄여대는데, 마치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되는 듯, 유바리 탄광에는 미군의 폭격이라는 빨간 눈이 내린다.

 

한편, 아오모리 시골 마을의 이자카야 마구로에서는 주인 노리코가 매일 밤 가게 앞에서 울어대는 고양이의 새끼들을 묻어주고 돌아와 허무함과 허탈함에 몸서리를 친다. 전쟁은 사람도 고양이도 모두 미쳐버리게 했다. 노리코의 가게에서 세 들어 함께 사는 마유미는 앞날이 컴컴하기만 한 세상에서 술에라도 기대어 본다. 벌써 며칠째 가게에는 손님도 없다. 노리코는 누가 올지 모른다며 가게를 열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가게 문이 열리더니 숯검댕이 얼굴을 한 남자가 토모의 누나 마유미에 관해 묻는다. 오래전 아버지를 따라 소매치기 일을 하러 나갔다 경찰에 끌려갔던 토모는 유바리 탄광에서 같은 숙소였던 요한의 도움을 받아 폭격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 누나 마유미와 이모 노리코와 눈물의 재회를 한다.

 

마유미와 토모가 재회의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에 빠져 있을 무렵, 덩그러니 서 있던 요한이 조선인이란 것을 안 노리코는 그를 경계한다. 토모는 요한이 형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두 사람을 설득하고 우선 통행증이 없으니 가게에 머물라 말한다.

 

손님이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밤, 단골손님 세 사람이 마구로를 찾아온다. 아오모리 항구의 하역장에서 일하는 세 사람은 불만이 많다. 아무리 일해도 보답받을 수 없는 삶. 내가 게을러서인가 탓해보기도 하지만 억울하고 분통한 감정은 가시지 않는다. 노리코와 마유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단이 바깥에 흩뿌려지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 아오모리에 미군의 폭격이 내릴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당황해있는 동안 하역장의 감독관이 나타나 세 사람에게 큰 호통을 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오모리를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단골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에 넋을 놓아버린 토모(*PTSD) 때문에 마유미가 눈물짓는다. 노리코는 두 사람에게 아오모리를 떠나 자신의 부자 친구인 사치코를 찾아가라고 설득한다. 노리코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유미는 절대 가지 않겠다 하지만 넋이 나간 동생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떠나기로 한다. 마유미와 토모가 짐을 챙기는 동안, 단 둘이 남겨진 노리코와 요한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마유미와 토모를 보내고 가게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시작되는 폭격의 폭음을 들으며 요한의 과거 이야기를 나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써 웃어 보인다. 국적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것 같은 서로. 두 사람은 긴장을 풀기 위해 마작판 앞에 앉는다. 요한의 말처럼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과 낯선 게임을 하려던 그때, 검은 숯덩이를 등에 업은 마유미가 나타난다. 토모가 피난길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오모리의 폭격은 이어지고 그렇게 밤이 지나간다.

 

 


 

가급적이면 시놉시스를 적지 않고 후기를 채워보고 싶었는데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작품에 대한 후기를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극의 흐름을 내 언어로 표현해봤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시각적인 작품인 만큼 이렇게 글로 남기면 의미가 퇴색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에 대한 언급 없이는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우선, 아직도 귀에 맴도는 배경음악이 극과 찰떡같이 어울렸다. 박근형 선생님의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세련되고 센스 있는 음악들이어서, 맘 같아서는 네*버 앱을 켜고 음원을 알고 싶을 정도였다. 적재적소에 심금을 울리는 음악들이 나와서 작품에 훨씬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나는 배우나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를 뜯어보는 일에 몰입하는 편이다 보니 네 번을 보면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파극이지만 억지로 울리려고 하는 부분도 없어서 좋았다. 전쟁 중의 충분히 납득 가는 상황들이 이어졌고 그 결과물들에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사도 하나같이 다 주옥이었고 한국어를 참 아름답게 활용했다고 생각했다. 요한이 폭격에 대해 예언하면서 '눈이 나린다, 빨간 눈이 나린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나린다'는 표현이 참 좋았다. 노리코와 마작판에 마주 보고 앉아서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과 낯선 게임을 한다'라고 하는 표현도, 폭격으로 결국 죽게 된 노리코가 요한에게 '어디를 가요 이 검은 몸으로'라고 하는 표현도 참 좋았다. 참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을 애틋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대사들이었다.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처럼 희곡집으로나 소책자 대본으로라도 나오면 좋겠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공연인 만큼 첫 두 번과 마지막 두 번에는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은, 술 취한 마유미가 밖에서 울어대는 고양이에 화가 나 '저리 가 이 새끼야!'하고 화내는 모습에 노리코도 '그만해!'하고 소리치는 장면이었는데, 26일 공연에서는 노리코가 마유미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17일 날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었는데 그 영향이었던 걸까? 그리고 마지막 장면 연출이 바뀌었다. 마유미가 숯이 된 토모를 엎고 들어와서 숯덩이를 풀고 품에 안고 '이 새끼 살아있을 때 더 잘해줄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게 숯덩이를 등에서 풀지 않고 자기 몸에서 숯덩이를 내려놓으려는 요한에게 손대지 말라며 '이 새끼 내가 업어서 키웠어요'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게 훨씬 좋았다. 

 

첫날 극장의 맨 사이드 자리에 앉아서 보느라 첫 장면에서 창이 드르륵 열리며 '일을 하여야 한다'라고 대사를 하는 성노진 배우님 뒤로 일장기가 있었다는 건 둘째 날 알았다. 일장기는 언제 봐도 참 불편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한 점이 없진 않았다. 1945년 전쟁 중인 일본을 무대로 하다 보니 아무래도 등장인물들이 다 일본인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피해를 보는 모습이 극 중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요한에게 노리코가 일본인이 밉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가 그런 거 없다, 사람 사는 거 다 힘들지 않냐고 말하는 장면이 참 불편했다. 의도적으로 당시를 살아가던 일본인들을 피해자로 그리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같이 보러 갔던 동생 말 마따다 '피해자 입장인 국가의 사람으로서' 불편함은 불가피했다. 이 불편함도 의도한 것이라면, 연출이 천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참 좋았던 작품인 만큼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마무리 지었다. 이야기와 감상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작품을 곱씹으니 참 좋다. 불편함 때문에 내가 이걸 좋아해도 되는 건지 꽤 고민했지만 이러건 저러건 참 연극다운 연극이었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은, 희곡집이 나오는 것이다. 선생님 이 작품도 문서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1. 오로지 한 캐스팅으로 2주간 진행되는 작품을 네 번이나 보면서 날짜별로 정리하기보다 하나의 글로 정리했다.
  2. 후에 연출님 말씀을 들어보니 마지막 장면이 바뀐 건 노리꼬 역의 강지은 배우님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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