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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파우스트 엔딩』(20210315, 명동예술극장)

감상/공연

by mizu-umi 2021. 4. 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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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면 한번 즘은 서울역이나 명동역에서 국립극단 작품을 보곤 했다. 작년에는 배삼식 작가의 화전가가 공연 중이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부득이하게 작품이 취소되어 보기를 포기했고 그나마 보고싶었던 햄릿도 취소되어서 한동안 명동에 공연 보러 들릴 일은 없었다.

 

 

파우스트 엔딩은 포스터와 홍보 이미지, 스틸컷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2차 티케팅 때 꼭 한장이라도 구매해서 봐야겠단 생각에 달려들어서 한 자리를 구했다. 너무 큰 기대는 품지 않도록 하면서도 조금은 들뜬 마음과 함께 명동으로 향했다.

 


 

내가 아는 파우스트는 만화 샤먼킹에 등장하는 파우스트의 자손인 파우스트 3세다. 실은 그 만화 때문에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읽고 싶어서 큰 서점에서 책을 샀던 기억이 있는데, 희곡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이였다보니(초등학교4학년) 낯선 문장들과 표현들에 거부감을 느끼고 집안에 고이 모셔두고 살다가 얼마 전에 처분했다. 이 작품을 볼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갖고 있다가 읽어 보는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메피스토 펠레스라는 악마가 신과의 내기로 파우스트를 유혹해서 젊어지게 만든 다음 지옥으로 데려가려했으나 결국 파우스트는 구원받는다는 내용만 알고 있었다.

 

조광화 연출의 파우스트는 원작과 달리 여성이다. 70년 평생을 연구에 몰두해온 학자라는 점은 그대로이다. 그레첸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는데 사전에 읽어본 예술가와의 대화에서 그대로 여성으로 나온다는 이야기에 매우 놀랐다. 지난 햄릿에서는 오필리어를 남자로 바꾸었다면 파우스트엔딩에서는 그대로 여자로 남아있다. 여자인 파우스트와 또 같은 여자인 그레첸의 관계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했다.

 

 

명동예술극장의 상석 중 하나인 6열에서 보는데 무대도 배우도 잘 보여서 참 좋았다. 무대 미술이 매우 훌륭하고 연극이라기보다 음악극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만큼 노래도 많이 나와서 눈과 귀가 즐거웠다. 파우스트 자체가 방대한 판타지인만큼 세계관이 드러나는 의상과 배우들의 분장, 그리고 이번 무대를 위해 제작된 퍼펫들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내는 순간으로 하나의 거대한 ritual을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한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눈돌릴 틈 없이 빠른 리듬의 전개로 10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문제는, 화려한 겉모습에 치중한 나머지 깊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약 10~20분 사이는 위의 이유로 작품에 대한 기대가 상승했다. 김성녀 선생님의 파우스트가 스스로 고민하며 내뱉는 독백이며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퇴장한 다음 등장한 그의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열의와 욕망을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기대를 부풀렸다. 하지만 파우스트와 그레첸이 만나는 순간부터 내 기대는 하향선을 그렸다.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에 대해 어떤 기대가 있었던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이 전개되는 내내 두 사람의 관계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읽었던 예술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레첸이 임신한 상태고 파우스트는 그런 그레첸을 보고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파우스트가 그레첸에게 느끼는 감정이 대체 무슨 사랑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임신을 한 여인을 20대 이후로 처음 보고서 출산율이 낮아져가는 위험한 시대에도 아이를 낳으려는 그레첸에게 애틋함을 느낀 것이라면, 적어도 후반에 파우스트가 그레첸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와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야 했던 것 아닐까? 물론 사랑에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70대였다가 20대로 돌아온 파우스트가 20대 여인이 아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모습에 애틋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 감정은 연인적이기보다 친구적이고 가족같은 마음일텐데 이것을 갑자기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으려고 하질 않나, 나중에 가서는 사람들이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를 [여자와 여자가 사랑한다니 미쳤다]라는 식으로 몰아가질 않나... 그레첸의 오빠가 파우스트를 연인으로 보는 듯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에게 질투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되고 여동생이 연인을  결국 파우스트가 그레첸의 오빠까지 죽이게 만들거였으면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는 정신적으로나마 로맨틱한 관계였어야 했다. 아니면 욕먹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모성애로 그렸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이 작품 속 파우스트는 그레첸을 결혼으로 보호해야하는 파트너로 보기 보다는 엄마의 감정으로 돌보는 듯한 느낌이라서 이러한 전개가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김성녀 배우님이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젊은 여자배우와 동성애적인 관계를 그리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배우님이 정말로 이 관계를 그려내지 못하셨을까? 작품 속 배우님의 연기를 본 나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연기하셨을 것이다. 각색을 한 연출이 이러한 관계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림이 생각나는 극이었다.

 

이외에도 파우스트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괴로워 하다가 갑자기 시장이 되었는데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 시장이 되고 나서 자신의 제자들이 벌인 끔찍한 일을 보고 본인도 따라서 그 상황에 빠지는 과정 등이 얼렁뚱땅하게 전개되었다. 무엇이든 더 설명이 필요한 것들을 뭉뚱그려버렸다는 인상이 강했다. 앞서 말했든 섬세해야 하는 부분마저도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작품이어서 실망이 컸다.

 


 

아마데우스에 이어 햄릿, 그리고 파우스트 엔딩까지 원작과 다르게 여자 배우가 주인공을 맡거나 인물의 성별이 바뀐 작품을 보면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우선 여자의 여성으로서의 고충이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갖는 게 나의 편견일지 모른다. 여성이 하든 남성이 하든 그저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고 사람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감상법이며 앞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가야 하는 방향일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분법이 존재하고 그 안의 수많은 소수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으로서의 고충이 작품에 묻어나야 하지 않을까? 현재 젠더프리 작품들을 보면 그런 고충에 대해 고려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젠더프리라는 화제성에만 머무르는 것 같다.

 

대중에게 더 많이 보여지는 작품들일수록 그런 고충이 덜해지는 게 아쉽다. 앞으로는 좀 더 고민하고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하면 좋겠다.

 


  1. 김성녀 선생님의 장기 중 하나인 노래로 작품이 마무리 되는 게 참 좋았는데 이런 작품들은 OST가 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게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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