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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베르나르다 알바』(20210320, 부산 하늘연극장)

감상/공연

by mizu-umi 2021. 4. 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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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란 문화재단에서 여자배우가 우르르 나오는 공연이 올라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굉장한 기대작이었다. 아쉽게도 초연이 상연되는 기간 동안에는 일본에 있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온 후기를 구경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우란이나 두산 하면 실험극을 자주 올린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에서 여자 배우만 10명이 나온다니 엄청난 모험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티켓은 금방 매진이 됐고 공연을 보고 온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열띤 후기를 보며 언젠가 재연으로 돌아오면 꼭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20년, 베르나르다 알바는 두 명의 멀티를 제외한 나머지 역할을 전부 더블 캐스팅으로 바꾸고 무대도 새롭게 갖추는 등 몸집을 더 크게 불려서 돌아왔다. 다만, 극장은 여전히 소규모다 보니 공연기간이 훨씬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회차가 풀릴 때마다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뮤지컬 덕후판을 보면서 여러 번 피케팅에 실패한 전적이 있는 나는 티켓팅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번에도 못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유일한 지방 공연인 하늘연극장은 극장 규모가 더 커지고 좌석이 남는 편이었고 공연을 같이 보자고 한 친한 언니 덕분에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연극장 로비

 

부산은 놀러만 가봤지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캐스팅보드

 

캐스팅 보드에 나와 있는 여자 배우들 얼굴만 봐도 그저 감동....🥺 멀티 배우들을 제외하고 총 8명의 인물들이 더블 캐스팅이기 때문에 모든 캐스팅을 보려면 우선 총 2의 8제곱(256) 번의 공연이 있어야 할 정도다. 같은 캐스팅이 중복되기를 바란다면 공연 자체가 500회를 넘겨야 하는... 어마 무시한 캐스팅이다.

 


 

로비에 있던 포토부스

 

기대가 높으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 따라서, 공연을 직접 까서 보기 전까지는 최대한 내가 보려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이하 베알)]도 보기 직전까지 최대한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했고 덕분에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SNS에서 베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급적이면 피하려고 노력했던지라 내용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아래와 같다.

 

  • 베르나르다에게 다섯 딸이 있다
  • 베르나르다에게 시녀가 있다
  • 베알에 할머니가 나온다(누군지 모르겠다)
  •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다

 

원작도 읽어보지 않았을뿐더러 공연 피로 영상은 하나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늘 그렇듯 아는 게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을 봤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

베알에서는 프롤로그가 엄청 중요하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등장인물 소개를 프롤로그에서 다 해버렸다. 다만 내 자리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대사를 조각조각 알아듣고 그 조각을 맞춰가면서 극을 이해했다.

 

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오브제(objet)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의자다. 등장인물들은 의자에 기대어 기도도 하고 앉아서 편히 쉬기도 하지만 어떤 정해져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베알에서 의자는 쉴 수 있는 도구임과 동시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의 위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딸 중 아델라를 제외한 나머지가 집사인 폰시아와 시녀들과 함께 각자의 의자에 앉아 수를 놓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앙구와 마르띠리오의 의자는 앞에 놓여져 있고 나머진 뒤에 있다. 지금 돌아서 생각해보면 앞으로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앞으로 이 두 사람이 있을 것이란 걸 암시하는 구도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입은 검은 상복들과 대조적으로 하얀 잠옷이 나온다. 하얀 잠옷은 노망이 나서 헛소리를 떠드는 마리아 호세파와 어떻게든 이 집을 빠져나가서 연인과 함께 하고 싶은 아델라가 입고 나온다. 몸은 이 집에 발을 디디고 있을지언정 영혼마저 이 곳에 묶여있지 않다는 걸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하얀 물건으로 수를 놓는 천이 나오는데 하얀 천을 하나 하나 건네 받은 딸들이 뻬뻬의 노래를 부를 때 그 하얀 천을 두르는 것은 어쩌면 자신들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게 아닌지 싶다.

 

인물들의 바람과 욕망이 하나하나 소개되고 난 다음, 숫말과 암말의 정사를 구경하는 장면에서 욕숫말과 암말의 정사씬에서 숫말 역할 맡은 배우님이 머리카락을 풀고 갈기처럼 하고 나온게 너무 좋았다. 대사가 잘 안들려서 이게 뭔 장면인지 들리는 단어로만 조합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갈기처럼 푼 머리카락 덕분에 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카라즈카가 떠올랐다.

 

극 후반부에서 방문을 걸어잠근 아델라의 문을 남은 가족들이 두들기고 소리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장면과 문이 열린 순간 하얀 의자가 떨어지면서 아비규환이 되는 순간엔 나도 함께 미쳐버릴 것 같았다. 모든 배우가 검은 상복을 입고 있고 음악은 플랫되거나 어두운 분위기가 많아서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겠구나'싶었다. 베르나르다의 말만 듣고는 그게 뻬뻬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거짓인 걸 안 순간 아델라가 죽을 것 같았다. 다섯 자매들 모두 여자의 숙명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데 그걸 사랑이라는 광기로 해소하려는 아델라에게 있어서 거짓일지언정 연인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 되었을 테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침묵하라고, 슬픔도 홀로 간직하라고 말하는 베르나르다의 '쉿, 쉬이잇'에 마르띠리오의 말 중 역사는 돌고 돈다는 대사가 생각났다. 아, 이 모든 것은 반복되겠구나.

 

한편, 뻬뻬 로마노가 대체 왜 그렇게 그 다섯 여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지가 쉽게 납득가지 않는다. 뻬뻬를 왜 그렇게 다들 좋아한걸까? 잘생겼나? 안토니오나 앙구스티아스의 아버지는 외모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이 있는데 뻬뻬는 잘생겼단 이야기도 없고 젊다는 말밖에 없었다. 어쩌면 대사를 다 알아 듣지 못하고 시간이 좀 지난 상태라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언급이 있었는데도 놓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딸 중에 셋이나 뻬뻬에게 마음을 두려면 뻬뻬가 마성의 남자라는 사실이 강하게 부각되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닌 것 같았다.

 

아멜리아와 막달레나도 딸들이긴 한데 앙구스티아스, 아델라, 그리고 마르띠리오가 많이 부각되는 인물들이라 저 둘은 있으나 마나 한 느낌이었다. 다섯 딸은 다 달랐고 각자가 각자의 욕망을 가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폰시아가 개인 넘버나 독백이 있는 것 치고 생각보다 뭔가 활약하는 장면은 없어서 아쉬웠다. 독백이 있다는 건 그 독백이 어떤 장치로 작용한다는 의미일텐데 말이다.

 

공연을 보고 나서 다른 캐스팅들의 이미지나 영상도 조금씩 봤는데 같은 작품인데도 배우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해석이 상반될 정도로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베르나르다부터 시작해서 폰시아, 마리아 호세파, 다섯 딸들 모두 배우들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아서 완전 반대되는 캐스팅으로 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날 본 배우들의 합이 좋았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

 

베르나르다 - 이소정

아무래도 기획제작에 정영주 배우님이 계시고 초연부터 해오셨으니 정영주 배우님 베르나르다가 궁금했는데 이소정 배우님의 베르나르다가 너무 좋았다. 베르나르다 라는 이름이 독일어로 [용감한 곰]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하는데 이름과는 살짝갭이 있는 베르나르다였다. 가부장을 대물림 받아 권위적이게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여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게 드러나는 장면은 안토니오를 떠올리며 '난 너의 창녀'라며 노래하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안토니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납득되지 않았지만 베르나르다도 한낱 여자였을 뿐이라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폰시아 - 한지연

한지연 폰시아가 베르나르다에게 갖고 있는 분노는 단순한 분노로만 보이지 않았다. 뒤틀린 애정 같은... 그러면서도 아가씨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라 다섯 딸들에게는 엄마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였지 않을지.

 

앙구스티아스 - 김려원

원작에서도 앙구스티아스가 그런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려원 배우님의 앙구스티아스는 첫째 딸이지만 강하지 못하고 누구보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여린 인물이었다. 앙구스티아스 그 자체였음. 뻬뻬를 사랑했다기보다 뻬뻬가 자신을 이 집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단이었기에 결혼에 매달린 게 아닐까 싶었음.

 

막달레나 - 황한나

황한나 배우님 키 얘기를 SNS 타임라인에서 엄청 많이 봤는데 압도적으로 키가 크셔서 정말 눈에 띄었다. 이외에도 프롤로그에서 앙칼진 소리를 내는게 눈에 띄었는데 이야기의 주축이 앙구스티아스와 마르띠리오, 아델라로 좁혀지면서 여자의 운명은 저주받았다는 대사를 제외하고는 막달레나라는 인물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은게 아쉬웠다.

 

최근 사진이 없어서 과거 사진 가져옴 ㅜ

 

아멜리아 - 김환희

엄마에게 가장 순종적인 셋째 아멜리아. 김환희 배우님의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귀가 넘 황홀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랑스러운 아멜리아 랄까. 크게 드러나는 인물이 아닌게 아쉬웠다.

 

 

마르띠리오 - 김국희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건 김국희 배우님의 마르띠리오다. 마르띠리오는 잘생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유일하게 못생겨서 남자들이 싫어하는 인물. 매부리코에 등이 굽었고 자존감 낮지만 사랑 받고 싶어한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못생긴 마르띠리오가 남자들에게 무시 당하면서 가졌을 발톱을 숨긴 분노와 광기가 아델라나 앙구스티아스를 보면서 스멀스멀 삐져나오는 모습에 반했다 공연 끝나고 나서도 국희배우님의 마르띠리오가 부르던 '널위한노래'만 읊조렸을 정도였다.  앞으로 국희 배우님 공연 다 보러 다닐것 같다.

 

2018년사진

 

아델라 - 오소연

딸 중에 가장 예뻤다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오소연 아델라의 등장이 어둡고 칙칙한 극을 환기시켜주었다. 의기소침한 언니들과는 달리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나가려는 열정이라는 이름의 광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2018년 사진

 

마리아 호세파 - 황석정

황석정 배우님==마리아 호세파. 그냥 인물에 푹 절여져있는 거 아니신가... 나오는 횟수가 넘 적어서 아쉬웠음...

 

시녀들 - 이진경, 이상아

뻬뻬와 안토니오, 그리고 숫말 연기하시는 이진경 배우님은 분량은 적어도 나오면 거의 춤을 춰야했어서 다른 분들 보다 힘들었을 것 같다. 다른 시녀이자 암말 연기하는 이상아 배우님은 자기 인물에 거의 빙의한 상태셨다.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10명이나 되는 여자배우들을 무대위에서 볼 수 있어서 넘 좋았고 김국희 라는 배우를 알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작품을 더 이해하려면 원작을 읽어보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1. 마르띠리오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 아니라는 점에서(o로 끝나니까) 마르띠리오라는 인물이 현재의 트랜스젠더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는 여성이라고 정체화하고 있지만 모두가 '여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갖지 못한 존재.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라서 이도저도 아닌, 가장 약하기에 아등바등 거리던 순교자였다.
  2. 김국희 배우의 인터뷰가 참 좋다. 
  3. 포스터를 제대로 보려고 한적이 없었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베르나르다가 천을 두르고 있는 거였구나;
  4. 등장인물 이름의 뜻 출처 : blog.naver.com/jeongdongtheater/222262953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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