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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시간

과거의 흔적/일기

by mizu-umi 2021. 1.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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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Ovan, pexels.com

지난 일요일, 초콜릿 시리얼에 우유를 말고 동물농장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이날 동물농장에서는 유기견 보호시설의 실체를 취재한 내용을 방송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 유기견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동물농장이 끝나갈 무렵에는 지난날 쌓인 먼지를 치우기 위해 청소기를 꺼냈다. 위잉 위잉. 위협적인 청소기 소리를 요리조리 쫓아다니는 우리 집 멍멍이들과 함께 청소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청소 말고 짐 정리를 하자!


그렇게,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나 홀로 짐 정리가 시작됐다.

정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베란다 한구석에 버려지다시피 놓인 큰 리빙박스였다. 쓰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을 정리해 놓은 상자로, 2019년 11월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하기 전에 한 번 정리한 이후로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대지 않은 시간 동안 쌓인 먼지가 뚜껑에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었다. 어수선하게 이것저것 넣어놓은 데다 베란다 창고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혼자 힘으로 내려놓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화장실에 놓인 발 디딤대가 생각이 났고, 부랴부랴 디딤대를 가져와서 그 위로 올라간 다음 리빙 박스의 뚜껑을 열어서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무게를 줄이면 나 혼자서도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빠르게 회전해준 머리 덕분에 선반에서 무사히 리빙박스를 내리고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매우 추운 날이었지만-이날 최저 기온이 영하 17도였다- 과감하게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눈대중으로 큰 리빙박스 안의 내용물을 쭉 스캔하다 보니, 며칠 전 한 번 정리했던 작은 리빙박스 두개가 생각났다. 큰 리빙박스에 들어가 있는 물건 중 작은 리빙박스에 정리한 것과 중복되는 물건들이 있었다. 큰 것을 정리하려면 작은 것들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짧은 고민의 시간을 가지고 작은 리빙박스들을 꺼냈다.

 

큰 리빙박스와 작은 리빙박스에는 많게는 15년, 적게는 4, 5년 정도 된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됐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나 혹은 가족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들이었다. 어떤 물건들은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차라리 고민하지 말고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정리하다 보니 이마트 종량제 봉투 두 개를 채울 만큼의 버릴 것들이 나왔다. 마음은 조금 쓰렸지만, 몇 년을 상자 안에 담아놓고 방치해둔 물건들이었기에 버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거실에서 리빙박스를 정리하면서 정리하려고 꺼내 둔 책들이 생각났다. 소장할 생각이 없으면 절대 책을 사지 않는 편이라 책장에 남아있는 책들은 내가 아끼고 또 아끼는 소장용들이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주 거주지역이 한국이 아니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내 방에 책을 놔두는 것은 짐과 함께 미련을 쌓아두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들도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주변 사람에게 선물 받은 책들은 놔두고 구매한 책들만 따로 모았다. 마침 리빙박스 안에 쓰다만 물건들이 많아서,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책과 함께 당근 마켓에 나눔으로 올려놓았다. 누가 이런 걸 가져갈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연락이 왔고 순조롭게 물건들을 보낼 수 있었다.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하나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라 점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정리를 했다. 네시쯤 되어서는 외출했었던 아빠가 귀가하셨는데 내가 집 안을 상당히 어지럽혀 놓은 상황이라 매우 당황스러워하셨다(ㅋㅋ). 결국, 아빠도 합류해서 정리하기 시작했고 리빙박스 세 개 규모의 정리는 어느새 아파트 한 세대 규모로 커져 버렸다.

 

베란다 한쪽의 창고, 거실의 가구 재배치, 내 방 책장 정리 등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20시였다. 정리에 몰두한 나머지 배고픔 조차 잊어버렸다. 점심은 그날 당근마켓 거래하면서 받은 카페라테로 버틸 수 있었고 저녁에는 친한 이모가 잠시 집에 들러 가져다준 닭강정으로 버텼다.

 

아침에 시작한 정리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나니 피곤함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보면 방구석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정리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심적으로는 오랫동안 마음 한편의 부담을 덜어냈다는 생각에서였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있는게 추억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물건에 대한 집착인 건 아닐까? 이게 있음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없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니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런 정리는 주기적으로 할 생각이다. 짐을 줄이는 만큼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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